
지하철 역이나 버스 터미널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되려 잘 살더라는 풍문은 많은 시민들에게서 고민의 양을 덜어주었다.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준다면 얼마를 주어야 하는지의 문제로 적지 않은 고민을 했었던 시민들에게 말이다. 때를 같이 하여 종착역에서 내린 검은 안경 장애인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멀쩡히 두 눈 뜨고 걷더라는 이야기도 그리 귀에 설지 않게 되었다. 또 매일 저녁 적선 받은 돈을 동네 구멍가게에서 지폐로 바꾸어 가는 할머니의 벌이가 꽤 괜찮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랜저 타고 다니는 걸인 이야기는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 본 내용이고,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한두 번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걸인에게 적선하는 행동 자체를 꺼려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의식화해서 다른 사람에게 충고까지 하는 단계로까지 발전시키는 사람도 꽤 된다. 왠지 모를 죄의식과 유사한 기분으로 바구니를 못 본 척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손사래를 친다. 분명히 걸인들은 동정심을 이용해 제 부를 채우는 간악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바구니에 적선 하느니 차라리 그럴 돈으로 이름 난 구호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런 경험이 있다.
98년도였고, 걸인들의 손을 무덤덤하게 내칠 정도로 나 역시 의식화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저녁 나절이라 밥을 먹으러 학교 뒷문으로 빠져 나오던 참이었다. 나이 서른이 채 안 돼 보이는 사내가 내 앞을 막아섰다. 몹시 남루한 행색에 불쌍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배가 고파 그러니 얼마만 보태주십시오."
'오호... 또 이런 식으로 돈을 뜯어가는구나'하고 생각한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지나쳤다. 나를 따라온 그는 다시 간청했다.
"너무 배가 고파 그러니 식권이라도 한 장 주십시오."
아... 그때 나는 처음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있었다. 그를 '돈 뜯는 걸인'으로 단정하고서 마음은 이미 냉랭해진 상태였기에, 아무 말도 듣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그 사내는 내게서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비척거리며 사라졌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다. 그가 요구했던 건 '식권'이었다. 그는 정말 배가 고팠던 거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차마 밥을 먹지 못하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고등부 때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먹을 것을 구걸하는 손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죄다." 호재가 있다며 주식 투자금을 구걸하러 오는 사람이라면 거절해도 된다. 전세금이 조금 모자라다는 사람에게 돈 없다 말하는 것도 용서가 된다. 하지만 먹을 것이 없다고 돈 얼마를 간청하는 사람에게는 꼭 돈을 주어야 한다고 그분은 힘을 주어 말씀하셨다. 먹을 것을 위해 손을 벌리는 행동이야 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가장 비굴해지는 선택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설령 그것이 의심쩍을지라도, 그 의심의 여지가 시원치 않아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의 경험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선생님의 말씀 바로 그대로였다.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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