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박수빈 학생이 월간 <인물과 사상>에 그 이름도 찬란한 베스트셀러 작가 신경숙을 자근자근 밟는 서평을 투고한 적이 있습니다. 논리 구성이나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베스트셀러 작가 신경숙을 건드릴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감탄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불편함이 있었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기,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은희경의 작품이 그의 유명세 만큼이나 대단한가에 대한 글을 적기로 했습니다.
그에 앞서 저로 하여금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동기가 되었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박수빈 학생의 신경숙 작가에 대한 서평을 아래에 옳겨 봅니다.
■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고 - 박수빈 (부산 대천초교 6년)
1. 내가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은 이유는?
나는 나를 찾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이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나를 찾는 이야기라기에 읽게 되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이 두꺼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 읽기로 한 거, 끙끙대면서 겨우겨우 읽었다.
대체로 이 소설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 베스트 셀러라고 하다니……. 나는 이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어른들이 생각하기에는 아직 어린 아이다. 그런 내 눈에 재미있다는 건 문제있는 게 아닌가? 이 소설의 내용 하나하나 내가 이해못할 부분은 없었다. 그러면 이 작가님을 칭찬하시는 분들은 나보다 못하다는 뜻? 아닐 것이다. 어른들인데 그 정도 모르겠는가. 헉, 그럼 어떻게 상을 무려 여섯 개나 탔지?
2.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이유
이 『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둡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밝게 생각해야 힘든 일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지금부터 세밀하게 내가 생각하는 이 작가님의 글쓰는 능력을 평가해 보겠다. 나는 독후감을 쓸 때 토론을 목표로 그 글에 대해 평가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엄연히 독후감이기에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이 소설이 내 눈에 좋은 소설로 보이지 않는 것인지 줄여서 세 가지로 나누면 이렇게 된다.
① 줄거리 빈약
② 인물들의 개성이 없음
③ 실화인 듯 꾸며낸 글의 전개
이 외에는 주인공의 나약함이라든가 글의 전체적 난이도와 분위기이다. 난이도는 낮았고 분위기는 어둡다. 혹시 이 작가님은 애들이 읽기엔 어렵고 어른이 읽기에는 시시한 그런 소설을 쓰고 싶으셨던 것일까? 어찌됐든 지금부터 내가 뽑아낸 잘못된 점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1) 줄거리 빈약에 대하여
이 작가님의 묘사글이라든가 내용의 연결은 꽤 잘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인물의 성격이라든가 인생의 목표, 속마음이 어떻다든가에 대해서는 되어 있지 않지만 인물의 겉모습이나 그때의 행동 목소리 같은 것은 묘사를 아주 잘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소설로서는 아주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줄거리의 빈약함이다. 크게 글을 나눠 보면 다섯 가지의 사건으로 전개되고 있다.
① 주인공은 중국여행에서 돌아와 세 통의 전화를 받는다. 주인공의 조카가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
② 주인공은 일을 쉬기로 하고 고향에 다녀온다.
③ 주인공은 자기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다.
④ 주인공은 제주도에 가서 기억을 되찾는다.
⑤ 헤어졌던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에게 도움을 청했던 여자를 돕는다.
나는 이 글을 다섯 가지로 나누면서 알게 된 결점을 말하려고 한다. 이 소설은 작가님의 말대로 라면 사랑의 기억을 찾아 나서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내용이 전체 내용에 반영돼야 한다. 하지만 이 기억을 주제로 한 부분은 단지 몇 단원에 걸쳐 소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가장 큰 이 소설의 단점이다. 이로 인해 주 내용인 사랑의 기억은 소주제가 되고 말았다.
이 글의 첫 부분은 주인공의 조카가 기억을 토막토막 잃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는 글의 주인공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걸 강조하기 위하여 "예전에 너도 그랬었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대화에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너도 그랬었지라고 한다면 그랬었지는 과거형이다. 그러니 아직도 기억을 못 찾고 있다면 이상한 것이다. 그랬었지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설명글이 없었다면 나는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이 글의 주인공은 여러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기의 예전에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았다.
그런데 사랑의 기억을 찾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 것일까? 아니다. 사랑의 기억이 자기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인공은 기억을 찾아 나선 것일까. 이 글은 사랑의 기억으로 인해 자신을 찾았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의 주인공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일까? 게다가 하나의 기억을 잃어버렸다가 그 기억을 찾는 것이 나를 찾는 일인 것일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의 기억을 몇 가지 기억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토막토막 기억을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기억을 다 하고 있는 사람도 완전하지는 않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기억이 왜 중요한지를 이 글에서는 표현하고 있지 않다. 다만 기억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기억해 내서 나를 찾았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또 그 기억이 나약한, 그리고 남자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여주인공을 바탕으로 하다보니 사랑의 기억으로 결정된 것뿐인 듯하다. 하지만 이왕 정하게 된 기억인 만큼 거기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도 작가님은 그것을 소홀히 했다. 이것이 소설로서의 치명적인 단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왜 인물들은 개성이 없을까?
다음으로는 인물들의 문제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주인공을 특별히 여기고 잘해준다. 작가님은 그런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일까?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사람이 좋은 사람만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면 진짜로 작가님은 자기 자신을 바탕으로 이 기차의 주인공인 하진이라는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일까. 그렇다면 진짜 작가님은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헌신적이고 자기 자신을 아껴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진짜 그렇다면 공주병이 따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인물들은 전부 성격이 그게 그거고 밋밋하다. 대화글 다음에 설명글이 없었더라면 누가 누군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 정도로 이 글의 사람들은 언어에 대해서는 전혀 개성이 없을 뿐 아니라 인물들이 하는 대화도 뜻이야 논리적으로 보이거나 말거나 표현이 틀리다. 어떤 평론가께선 하나하나 대화글을 잡아가면서 이 작가가 글을 잘쓴다고 칭찬하시는데 나도 똑같이 하나의 대화글을 잡아서 평가하겠다.
선생님은 나를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내 마음을 말해도 돼요.
네……술 마셨어요. 잠이 안 오고……
아……침이 올 걸 생각하면 끔찍해서.
아무리 술을 마셨다고 해도 "아……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침이……"라고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러므로 이 작가님은 어떻게 사람이 말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읽기에 "아 말이 안 나와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 작가님은 말을 할 때 단어단어 말하지 않은 채 이 글에 나오는 띄어쓰기 형식으로 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아무리 슬픈 상황에서도 술을 마셨어도 단어단어 구분할 수는 있다. 그것을 작가님은 무시하신 채 점점점 표현을 써서 읽을 때 슬프다는 걸 강조하려고 하고 있다.
아니면 작가님은 정말로 이렇게 단어단어 말하지 않은 채 슬플 때 자기소개를 하면 "저……는신경…숙입니……다"라고 하는 것일까? 진짜 작가님은 이렇게 언어 능력이 없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도 그 정도보다는 뛰어난 언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기차는……』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보다 말을 어렵게 하고 있어도 사실은 그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실제 사람들과 닮아야 현실성이 있는 것인데 대화에도, 캐릭터의 성격에도 현실성이 전혀 없다. 이것이 내가 지목하고 있는 이 소설의 결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 표현은 우리 초등학생들도 자주 쓰는 하나의 방법이다. 어떤 테크닉이라 부르는지는 몰라도 그런 표현은 초등학생들도 쓰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표현 하나 잘했다고 상을 주고 칭찬하고 읽어주는 것일까. 이런 표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인데…….
3) 실화와 소설을 구별하세요
마지막 결점은 이 이야기가 실화인 듯 꾸며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실화를 다룬 이야기인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주인공처럼 한심한 사람이 어떻게 아무리 사랑의 기억이라 해도 자기의 힘으로 기억 같은 걸 찾아낼 수 있을까.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뭐 어차피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이 여자가 스스로 기억을 찾을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공은 내 예상대로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려 기억을 찾았다.
왜 주인공은 여러 사람에게 의지해야 했을까. 어떤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여자니까' 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한심한 여자가 극히 드물다. 아무리 이 책이 잘나간다고 해도 이 책의 여주인공만큼 한심한 여자는 일본 만화책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다만 이 글을 읽고 내가 그런 한심한 여자가 될까봐 걱정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작가님은 그런 한심한 여자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라면 여자 자신을 조금 더 강한 사람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내 말이 조금 건방지더라도 이건 정말 사실이다.
3. 작가님에게 하고 싶은 말
이 소설에는 작가님의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것이 없다. 이런 소설을 베스트 셀러라고 하며 읽는 사람들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이 작가님은 자신의 연대표라 칭하는 히트작을 몇 작품 가지고 계신 것 같기는 한데 내가 보기엔 연대표를 가지기엔 아직 이른 것 같다. 이 글의 작가님은 더욱 사람들의 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고 줄거리 쓰기에 대해 공부를 더 하신 후 자기에 대한 생각과 여자에 대한 생각을 바꾸셔야 제대로 된 베스트 셀러 작가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글에 대해 공부를 아주 많이 더 공부를 하셔야 그런 대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될 수 있으실 것 같다.
내가 이렇게 평가한다고 내가 이보다 더 잘 쓴다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독자적 차원에서 평가할 때 베스트 셀러 작가의 이름이 아깝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나도 베스트 작가를 동경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글이 베스트 셀러가 된다면 너무나 실망이다.
내가 왜 베스트 셀러 작가를 동경하느냐 하면 나는 여러 사람이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사서 보면 또 다른 사람이 사서 보고 그렇게 계속 연결되면 많은 사람이 내 글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베스트 셀러 작가를 동경한다.
인생이란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길어도 채 백 년도 채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두운 인생은 어떤 어려움도 견디기가 힘들다. 나는 이 글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한심하지 않은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시는 분들께 여쭙고 싶다. "저기……. 어느 시대의 어느 나라 남성우월주의이신가요? 요새 사람이시라면 너무도 뒤떨어지신 분이시네요. 글도 성격도 남녀는 아무 벽도 차이도 없거든요."
우리 아빠는 항상 내게 말한다. '남자에게 지면 안된다'고. 나는 이 말을 항상 머리속에 되새기고 또 새긴다. 하지만 남자들의 생각이 아직 남성우월주의에 가 있다면 나는 벌써 남자들을 이긴 것이다. 그런데 남성우월주의에 가 있는 남자 어른들도 아내를 백치 미인을 얻었는데 딸을 낳았다면 그 딸에게는 너는 남자에게 져서는 안되고 백치 미인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만큼 한심한 것도 없다면서. 그렇다고 내가 울 아빠를 비난하는 건 아니다. 아빠는 지성미가 철철 넘쳐 흐르는 엄마랑 결혼했으니 백치 미인을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적어도 나는 내 친구들이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감명 깊게 읽은 후 여자는 나약하고 남자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내가 읽은 이 소설의 평가이다.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을 때 지적한 부분은 세 가지였는데 그만 흥분해서 대여섯 가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작가님보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래야 한다는 걸 말한 것뿐이다. 나는 남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내 생각을 마음껏 얘기했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이 책이 나를 찾는 이야기라고 해서 읽었었는데 겨우 사랑의 기억 하나를 찾았다고 나를 찾았다는 것은 왠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자기 자신이 자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그때부터가 나를 찾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독후감을 읽으신 분들도 나를 찾으시길 빌겠다.
(월간 <인물과 사상> 1999년 11월호 중에서)
이 서평이 알려지면서 박수빈 학생은 금새 유명해졌습니다. 두달여간 <인물과 사상>사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박수빈 학생의 글을 두고 온갖 토론(욕설을 포함해서)이 오고 갔습니다. 일간지 반페이지를 차지하는 기획기사에까지 소개되기도 했죠. 초등학생의 서평이 불러일으킨 반향치곤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저 역시 박수빈 학생의 서평을 읽으면서 적잖은 공감을 했습니다. 다들 베스트셀러 라면서 치켜세우는데 정작 나는 "이게 베스트셀러 값어치가 있는가?" 계속 갸우뚱했던 몇몇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작가가 은희경입니다.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며 "이딴 글나부랭이가 우째 베스트셀러가 됐지?"하고 외치고 싶었전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대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교양국어'라는 과목을 들었는데 학기 중반쯤엔가 아주 좋은 책이 있으니 그걸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분부가 떨어졌습니다. 그 '좋은' 책이 바로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었습니다.
제가 당시만 해도 매우 순수해서(^ㅅ^;;) 좋다면 진짜 좋은 줄로 믿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새의 선물'을 사들고 세 시간 만에 읽어 제꼈는데요. 좋은 책? 모르겠더군요. 그저 허무했습니다. 쫌 있으면 재미있겠지, 재미있겠지 하며 읽다보니 마지막 페이지였습니다. 우째 이럴 수가! 교수님이 '좋은' 책이라고 느낄 만한 부분을 내가 빠뜨리고 지나갔단 말인가! 아니면 이 책의 주제가 너무나 고고하고 심오한 나머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깨달을 수조차 없다는 것인가!
결국 제가 내린 결론은 '나의 지적 능력이 너무나 떨어지는 나머지 이 귀한 책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였습니다. 설마 잡글 나부랭이를 그 위대하신 교수님께서 '좋은 책'이라 평가하시진 않으셨을 것이니까요. 명색이 교순데...... 틀림없이 이 책은 '좋은 책'인데 제 수준이 안 돼서 못 알아본 것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은희경이 '빠가(바보 - 위 책에 등장하는 단어)'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글을 재미있게 잘 쓸지는 몰라도 내가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건, '베스트셀러'라는 타이틀은 과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은희경만 빠가인 게 아니었습니다. 신경숙도 빠가고 그녀들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시킨 평론가들도 모두 빠가입니다. 그 교수도 빠가였던 것 같습니다.
왜 '빠가' 라고 생각하는가?
일단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재미있습니다. 신경숙 소설이 재미있는 것처럼, 이 소설도 재미있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입니다. 새의 선물이 각종 일간지 광고에서 인용하고 책의 뒷표지에도 적어놓은 소설가 오정희 씨의 평문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소설은 일단 재미있다........."
나는 오정희 씨가 다른 평론가들에 비해서 정직했다고 믿습니다. 그녀의 '이 소설은 일단 재미있다......'라는 말 뒤에는 여러가지 뜻이 담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단 우리 문단에서는 비판은 배제되며 서로 칭찬해주며 사이좋게 살아가는 '두레 정신', '동업자 정신'이 깃들어 있으니.........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어쩌다 인세 수입에 지장을 주는 평론이 나올라치면 문단의 이단아로 취급하고 '따'시키니 말입니다. 어쨌든 '이 소설은 일단 재미있다'고 말한 오정희씨의 지적이 가장 군더더기 없는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이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그뿐입니다.
소설을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신경쓴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그걸 가지고 '사람들의 삶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데, 칭찬할 말이 없으니 별 말을 만들어낸다 싶습니다.
새의 선물에서 발생하는 이벤트는 한 마디로 웃깁니다. 이류도 아닌 삼류 슬랩스틱 코메디에서나 등장할 법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특히나 나로 하여금 이 소설에 대한 짜증을 증진시킨 부분을 꼽으라면 '장군이가 똥통에 빠진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길게 인용을 해보았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진희는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읽기 바랍니다.
(전략)
선생님이 환경미화를 하느라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던 우리들 모두를 학교 앞 만두집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선생님이 사주는 만두를 먹고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반장이 사는 군수 사택은 향교말에 있었다. 우리 집과는 반대방향이었다. 만두집 문을 나오면서 나는 바로 내 뒤에서 반장이 바짝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반장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생님이, 야, 김범진 같이 가자, 하며 반장을 불렀다. 선생님의 하숙집도 군수 사택 뒤에 있는 향교말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합창으로 "안녕히 가세요"를 외치고 선생님이 "조심해서들 가라"로 대답하는 동안 나는 선생님의 등뒤에서 나를 뚫어져라 보고있는 반장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요건 장군이라는 남자아이다.) "그게 끝이야."
나는 일부러 여운을 두었다. 그리고는 조금 뒤에 혼잣말처럼 이렇게 덧붙였다.
"반장네 도로 서울로 이사간다더니 나한테 서울 주소라도 알려주려고 쫓아다니는 건가?"
그런 다음 나는 장군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덧붙였다.
"무슨 편지 같은 것을 주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을 들은 장군이의 얼굴에는 대번에 긴장이 떠올랐다. 환경미화 심사와 학교 앞 만두가게가 등장하는 나의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전혀 허구성을 느낄 수 없었던 장군이는 조금 식식거리기까지 했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마루에 나와 앉아서 얼핏 보아 편지로 보이는 종이쪽을 들고 읽고 있었다. 누가 오면 은근히 감추는 척하면서 장군이가 반응을 보일 때까지 그렇게 했다. 이윽고 장군이의 시선을 완전히 끌어당겼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것을 구겨서 손에 들고 변소로 갔다. 변소에서 나올 때 내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장군이는 변소 쪽으로 눈길만 줄 뿐 짐짓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나에게 자기 마음의 속풍경을 들킬까봐 자존심으로 버팅기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장군이에게 염탐의 기회를 제공했다. 우리 방 방문이 닫히자마자 장군이는 얼른 변소로 들어갔다. 장군이가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멍 사이로 내가 구겨서 버린 그 가짜 편지를, 똥의 켜 위에 얹혀 피어난 그 종이꽃을 내려다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거기에 팔을 뻗을까.
늘 나는 세상 일은 우연한 행운이 쥐고 흔드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 생각은 행운을 가질 기회를 얻기까지는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꽤 건전한 정강으로 보완돼왔다. 그러므로 장군이가 변소에 빠지고 안 빠지고는 이네 내 손을 떠난 문제였다.
그때 변소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행운은 순진한 장군이보다는 간교한 나의 편을 들었다. 나는 변소로 가볼 필요도 없이 곧바로 뒤란에서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던 장군이 엄마에게로 파발마처럼 달려가서 장군이가 똥통에 빠졌다는 비보를 전했다. 그런 다음 재빨리 우리 집 마루로 돌아와서 구경할 자리를 잡고 편안히 앉았다.
(후략)
괜히 슬랩스틱이라고 부른 게 아닙니다. 억지 상황을 이용한 억지 웃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국내의 '순풍 산부인과'나 외국의 '프렌즈' 같은 시트콤에서 이런 똥통 사건이 등장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웃어줄 용의가 있습니다. 코메디니까, 억지가 통하니까요. 그렇다면 은희경은 차라리 명랑만화 스토리작가로 데뷔하는 게 훨씬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대체 문학으로서 이 대목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 은희경님이 미천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제가 '그래 재미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 부분입니다. 이 책 전부가 재미있고 다채롭운 이벤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걸로 끝이고 더이상 우리한테 남는 의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즐거운 유머집을 샀다고 칩시다. 웃으며 배꼽잡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거기에 인생의 의미와 가르침이 있을까요. 깊은 성찰이 있고 묵상이 있을까요. 단지 재미있기만 할뿐입니다. 이야기에 능하나 메시지가 눌한 그녀, 은희경은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불리우기 보단 입담 좋은 수다쟁이라는 이름이 어울립니다.
은희경의 겉멋 부리기
새의 선물에서 은희경이 보여주는 또 한가지 역겨움은 '겉멋만 잔뜩 부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손발이 오그라들듯한 기분을 가져다 주는 책 내용 중 한 대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삶이 내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부터 성장을 멈췄다."
정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은 이를 일컬어 '주인공의 당당한 선언'이라 평가하는데, 개풀 뜯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은희경은 자신이 영화 '양철북'의 감독이나 되는 줄로 아는 모양이죠? 혹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라는 도입부로 유명한 소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처럼 뭔가 있어보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12살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소설적 당위가 있을까요? 그녀(은희경)나 그녀의 추종평론가들은 '어른 세계의 허위와 위선을 냉소적으로 드러내기 위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것은 요즘 여류작가들이 써제끼는 소설들의 공통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도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설정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가. 기성세계에 저항하는 은유적 의미로 사용
나. 묘사의 객관성을 위해 관찰자적 도구로 사용
그러면, '새의선물'에 해당하는 건 어느 쪽인가요? 당연히, '나'는 아닐테고, '가'인가요? 아니, '가'도 아니 것 같습니다. 왜냐면 주인공 진희의 정신연령은 은유적 의미에서 성장을 멈추었다는 게 아니라 알 거 다 아니까 성장을 안해도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서른 살 넘은 진희가 옛날의 일들을 회상하는 액자식 비스무리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서른이 넘은 진희와 열두 살 진희 사이에는 정신적 수준 차이를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아니, 오히려 열두 살 진희가 더 정신연령이 높은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봐라! 그래서 열두 살부터 성장을 멈췄다고 하지 않았냐!"며 떵떵거리겠지만 그건 사기입니다. 앞에 말을 돌려말하면, 서른 이상이 되어야 갖출 수 있는 사고 능력을 열두 살 아이가 이미 갖추었다는 이야긴데....... 공감이 갈 턱이 있나요. 진짜 정신적 성장이 없었다고 우긴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삼십대 진희의 정신연령은 열두 살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다고....
은희경은 대단한 기법인듯 폼을 잡았지만, 결국 열두 살 어린아이의 성장을 멈추게 만든 의도는 그 다채로운 소설적 이벤트를 다채롭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거기서 뭔가 대단한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쓴다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인에게서 정의로움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소설과 윤흥길씨도 ".......때로 이 심리묘사는 열두 살 소녀의 정신연령을 뛰어넘는 경우도 있어 흠이 되긴 하지만......"하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은희경의 겉멋은 계속됩니다. 이번 건 유치찬란하기까지 합니다. 아래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략)
처음에 나는 모멸감을 갖는 것만으로 그녀(진희의 삼년전 담임선생)에 대한 단죄를 마칠 뻔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내 눈앞에 그녀에 대한 모멸감에 전의를 불러일으키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녀가 빨간 때수건을 사타구니 쪽으로 옮겨 가져가며 갑자기 다리를 쫙 벌렸던 것이다. 거침없이 벌려진 다리 사이에서 불태우기 좋을 만큼 무성한 음모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나의 잔혹성은 상상력 속에서 맹렬한 기세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음모에 사정없이 불을 놓았다.
그러나 그날의 쾌거로 인해 나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성이라는 금지된 영역에 상상력을 사용했고 학생의 본분을 저버리고 선생님에게 잔혹행위를 했으며 게다가 일제시대 이후 모든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엄하게 다루는 게 교시로 되엉 있는데 거기에 불만을 품고 불경죄를 저질렀으니 상명하복의 시대정신을 위배하기까지한 나로서는 당연히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죄책감을 겪다가 어느 순간 나는 불현듯 내게 씌워진 그 죄목이 타당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한 번도 검토해보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추리소설도 적지 않게 읽어본 나로서는 피의자의 권리인 공정한 재판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점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내 마음의 변호사가 변론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중략)..........그렇다면 피고는 그런 자연스러운 상상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그것이 죄로 성립될 수 있다면 먼저 원인제공자인 창조주를 이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창조주를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내 마음 속의 판사가 판결을 내렸다.
금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금기를 깨뜨리는 죄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고에게 죄책감은 부당하게 강요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후략)
이 무슨 중학생 습작 같은 괴상한 스토리인가요! 이게 베스트셀러입니다, 베스트셀러!!!
글쓰기 기본에 대한 문제
겉멋을 부렸다는 비판보다 조금 농도가 짙은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평가입니다. 이 점에 대해선 박수진 학생이 신경숙의 소설을 가지고 지적을 했었습니다.
아무리 술을 마셨다고 해도 "아……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침이……"라고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러므로 이 작가님은 어떻게 사람이 말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읽기에 "아 말이 안 나와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 작가님은 말을 할 때 단어단어 말하지 않은 채 이 글에 나오는 띄어쓰기 형식으로 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아무리 슬픈 상황에서도 술을 마셨어도 단어단어 구분할 수는 있다. 그것을 작가님은 무시하신 채 점점점 표현을 써서 읽을 때 슬프다는 걸 강조하려고 하고 있다.
(월간 <인물과 사상> 박수빈 학생의 글 중에서)
이 대목에 대해서 은희경도 그에 못지 않게 기본적인 글쓰기 능력의 부족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지적한 기사가 있어 그대로 옮겨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문학텍스트로 거론이 불가능할 정도의 낮은 완성도인 은희경, 공지영의 경우다. 믿기 어렵겠지만 대중적 인기도와 상관없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기본인 문장부터 '하자 덩어리'의 불량품들이다. 은희경 소설은 대학강사 독신녀의 냉소적이고 분방한 남성행각이 그려졌다.
이 소재상의 선정성 때문에 팔리고 있지만, 단박에 눈에 띄는 것이 플롯상의 단선적인 틀이다. 엉성한 서사구조 속에 그려지는 주인공들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서사구조라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벽돌'인 문장은 대학생 습작 수준이다. 공연한 폄하가 아니다. 감칠맛은 고사하고 악문(惡文)이 즐비하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불현듯 걸음이 느려진다'(15쪽), '죄의식을 자청한다'(29쪽). '불현듯'은 생각의 순간적 착상을 표현할 때 구사하는 용어. 이것은 공연히 행동의 묘사하는 대목에 들어가 영 어색한 것이 앞문장이다. 또 '죄의식을 갖는다'고 하면 명쾌할 것을 적확하지 않은 한자어를 구사해 꼬인 경우가 뒷문장이다. 문제는 이런 문장이 거의 전부다. 마치 잘못된 번역소설을 읽듯 껄끄러운 것이 이 때문이다. 묘사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순정만화풍의 남자 친구'라는 '현석'은 이렇게 유치하게 그려진다. '갸름한 얼굴에 긴 속눈썹, 날카로운 콧날의 그의 얼굴은 투명해서 손바닥을 대면 그대로 통과해버릴 것 같다.' '순정만화 수준의 필력'은 따라서 악문을 거듭 만들어낸다. '노란 회초리처럼 개나리가 담벼락을 후려치며 가득 피어있다.' 세상에 담벼락의 개나리가 핀 것을 이렇게 엉뚱하고 억지스럽게 묘사하는 것은 문장이 아니다. 억지 묘사는 주인공 한명이 택시를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하면서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연극적이었다'(29쪽)는 포복절도할 엉터리 묘사를 낳는다.
공지영 역시 비문이 많기로 소문이 난 작가. '봉순이 언니'는 은희경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지만 사정은 매일반. 하얗게 눈앞으로 다가오는 아직 풀냄새가 풀풀 나는 새집의 낯선 벽지…'(7∼8쪽) 도대체 어떤 벽지가 '하얗게 다가서는'가. 이런 문장은 '새 집의 흰색 벽지에서 풀냄새가 남아있다'고 하면 된다. 사정이 이러니 60년대생 여성이 바라본 '그때를 아시나요'식의 성장소설이 설득력이 있을리 없다.(문화일보 1999년 1월 20일자)
은희경을 재론하자면, 소설 뒷부분에 술에 취한 남자를 묘사하면서 '(그는) 마치 밤거리에서 멋진 탭댄스를 추고 있는 것 같다'(270쪽)고 말한다. '한번 별나게 표현하려는' 의도이겠지만, 취객의 헛걸음질을 정교한 발놀림의 탭댄스에 끌어다 붙이는 억지묘사는 공감은커녕 헛웃음을 유발한다. 또 이 작가는 봄기운을 말하는 대목에서 '공사장 인부들도 마치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를 낭송하면서 일하는 듯하다'(13쪽)식으로 표현한다. 말할 것도 없는 2.5류 문장이다.
(문화일보 1999년 2월 3일자, 조우석 기자)
위력에 의한 조작
은희경 소설이 재미있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여러 번 밝혔습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문제는 왜 이 소설이 문단에서 그렇게 과분한 대접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위력에 의한 조작'과, 둘째 그것에 뒤이은 도피동화심리입니다.
'위력에 의한 조작'은 원래 예를 들어 설명하기가 무척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적사기(앨런 소칼 지음 / 민음사)'이라는 책이 나오면서 너무나 쉽게 설명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책은 그 유명한 '소칼논쟁'의 이모저모를 자세하게 들려주면서 '위력에 의한 조작'을 설명합니다. 문화일보의 관련기사를 인용해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요.
미국 뉴욕대 물리학 교수 앨런 소칼은 자크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자연과학 개념을 원용, 난해한 저술을 남발해 지적사기를 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줄리아 크리스타바 등이 소칼이야말로 진짜 사기꾼이라고 되받았는데, 이 두 진영간의 논쟁을 일컬어 소칼논쟁이라고 한다.
논쟁은 지난 96년 소칼이 과학개념의 오용과 논리적 비약으로 가득찬 패러디 논문을 미국의 포스트모던 저널인 '소셜 텍스트'지에 기고하면서 시작됐다. 문제가 있으면 지적해달라는 '경고성 멘트에도 불구, 이 논문이 아무런 문제없이 저널게재에 성공하자 소칼은 자신의 논문은 포스트모던 학문의 엄밀성을 시험하기 위해 쓴 것으로 "허위와 억지, 문법적으로는 정확하지만 아무런 뜻도 없는 문장의 잡탕"이라고 폭로해 버린 것이다.
소칼에 따르면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난해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나 괴델의 정리를 남용하는 것은 자신들의 독자들에게 겁을 주고 자신의 횡설수설을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간추리자면, 소칼은 의도적으로 어려운 용어와 난해한 개념, 각종 각주와 엄청난 분량의 인용구등을 잡탕해서 엉터리 논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그 논문이 뭔가 대단한 것인양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죠. 학계는 소칼의 논문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고 단지 소칼이 사용한 그럴듯한 현학적 요소에 놀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력에 의한 조작입니다.
그 다음에 따라 오는 것이 도피동화심리다. 이 개념은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의 내용과 같습니다. 남들이 대단하게 평가하니까 대단한 줄로 알고 나 역시 그 무리에 휩쓸려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은희경 얘기로 돌아가서, 은희경이 이렇게 터무니 없는 대접을 받게 된 것을 앞에서 살펴본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단 베스트셀러 작가로 군림한 이상, 은희경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어드벤티지를 얻게 되고, 뿐만 아니라 그런 어드벤티지의 권위에 눌려 그런 긍정적 평가에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현실입니다.
과대포장된 베스트셀러들
저를 가르쳤던 교양국어 교수님이 '새의 선물'에서 발견하신 그 위대하고 심오한 무언가를 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내가 무지하고 무식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 은희경은, 그리고 그녀의 소설은 허접쓰레기임에 틀림없으며 그런 쓰레기에서 의미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발견하신 그 '가치로운 것'은 무얼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수님의 수준이 너무나 소박해서 그 허접한 것도 큰 의미로 다가왔거나, 아니면 내로라는 평론가들이 다 잘 지었다니까 쫄아서 자기도 그쪽 줄에 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자기 기준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고의 주체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내 기준과 내 중심이 없다면 여러분은 은희경 소설을 읽고 그 고매한 가치에의 동의를 강요받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가 좋게 평가하는 건 괜찮습니다. 강요받는 게 문제이고, 아무 생각없이 타인의 평가에 매몰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의 일부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긍정적인 평가는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으며, 그들이 저작한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받는 평가 또한 과대평가된 측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에 반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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