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다른 글에서 진중권 씨(이하 존칭 생략)에 대해 비판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제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상대방이 절대적인 기준에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진영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조롱하는 경우가 많는 것, 그리고 자기가 비판하고 조롱한 행동을 자신이 저질렀다는 게 드러나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비판에 성찰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은 조국은 심각하고 전우용은 상당하며, 이 둘과 비교할 때 진중권은 상대적으로 덜 한 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은 자신의 비판이 상당히 전문가적 입장에서 객관적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해악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조국과 전우용의 발언은 가십에 가깝게 보도되지만, 진중권은 언론에 '인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진중권의 말과 글을 듣고 읽으면서 통쾌해하고 쾌감을 느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인지 부조화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 정도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마냥 그 쾌감을 즐기고 있기 어려웠죠.
탐 크루즈 주연의 영화 '잭 리처(1편)'에는 '제임스 바' 라는 퇴역 군인이 등장합니다. 제임스 바는 자원하여 이라크에 파병된 군인이었는데, 그가 자원한 이유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스나이퍼(저격수)'로 훈련받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가 소속된 부대가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살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적군이 아니라 아군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영화 '잭 리처'의 제임스 바에게서 진중권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때로는 '진보', 때로는 '정의'라는 포장지로 싸여 있지만,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부수적으로 그런 자아 충족의 기쁨이 없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지성을 도구 삼아 상대방을 비판하고 조롱하며 그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는 것이 우선시 된다면, 그에게 '진보'와 '정의'는 목표가 아니라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본말이 뒤바뀐 것이죠. 무려 '정의당' 당원인 그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임스 바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군인이 되었습니다. 진중권도 제임스 바와 똑같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비판함으로써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잘못된 주장에 경도된 대중의 의식을 깨우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지적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진짜 목적인 것 같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비판을 받은 상대방이 당황해 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활동 목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냐면... 제임스 바가 군인으로서 전투를 통해 욕망을 충족할 수 없게 되자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처럼, 진중권은 비판을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음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것이 무고한 사람의 인격을 말살하고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이라도 말이죠. 의식 있는 철학자 행세를 하지만 그저 사이버 렉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이버 렉카 : 인터넷 상에서 연예, 사회, 문화, 정치, 인터넷 유명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이슈가 된 각종 사건사고들을 짜깁기한 영상이나 글, 또는 이러한 사건사고에 대해 비판하는 영상을 주요 콘텐츠로 하는 이슈 유튜버나 인플루언서, 커뮤니티 유저들에 대한 멸칭을 말한다. 마치 사설 견인차(렉카)처럼 무슨 일이든지 사건사고만 났다 하면 풀악셀 밟고 부리나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을 비꼬는 말이다.(출처 : 나무위키)
그의 폭넓은 활동만큼이나 진중권에 대한 비판글은 이미 차고도 넘칩니다만, 제가 진중권의 진짜 정체성을 판단하게 된 단적인 사건이 두 가지 있습니다.
■ 1. 송지선 아나운서의 자살 암시 트윗을 조롱한 사건 - 2011년 5월 8일
2011년 5월 23일 MBC ESPN의 송지선 아나운서가 자신이 사랑했던 야구선수의 배신과 희망고문으로 우울증을 겪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자살 사건은 항상 전조 증상이 있다고 합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주변에 끊임없이 자신의 절박함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하는데, 진중권이 여기서 최악의 역량(?)을 발휘하고 맙니다.
2011년 5월 7일 새벽 송지선 아나운서는 자신의 트위터에 자실을 암시하는 글을 올립니다.
진중권은 정말 할 일도 참 없었던지, 정치/사회적인 중요 사건도 아닌 송지선 아나운서의 트윗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글을 올립니다.
진중권은 저 글을 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와! 나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난 어쩌면 이렇게 센스가 넘칠까!?!"
이런 생각을 한 걸까요?
정치인이나 공직자를 비판, 조롱한 것도 아니고 29세의 여성 아나운서가 모 야구선수와의 염문으로 이슈가 되던 와중에 올린 자살 암시글을 저렇게 조롱한 것에 어떤 사회적, 철학적 해석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2018년 6월 20일 중국 간쑤성 칭양시에서 한 여고생이 심한 우울증으로 호텔 8층 창문으로 투신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원들이 창문에서 내려올 것을 설득했지만 여고생이 쉽사리 맘을 돌리지 않자, 아래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여고생의 자살을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안 뛰어내릴 거야. 그럴 용기가 있었으면 진작 뛰었겠지", "왜 아직도 안 뛰어 내리냐", "덥다, 빨리 뛰어내려라", "아직까지 안 뛰어내리고 있어. 겁먹었나 봐" 등의 말로 여고생에게 비아냥 거렸고 일부 구경꾼은 여학생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아 SNS에 올리며 악플을 달기도 했습니다. 끝내 여고생은 투신하고 말았습니다.
진중권의 모습이 저 구경꾼들과 뭐가 다를까요? 그의 펜과 혀는 어떤 정의로운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저 비판과 조롱만을 위해 움직이며, 평소에는 짐짓 명분 있는 때와 장소에서만 움직이지만 때로 마땅한 대상을 찾지 못하면 충동적으로 아무에게나 비판과 조롱이 튀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설령 우울증으로 자살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진중권으로부터 '번지점프'라고 조롱을 당했던 송지선 아나운서는 보름 후인 5월 23일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오피스텔 19층에서 투신하여 자살하고 맙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중권의 인생에 있어 최악의 모습이자, 그의 숨겨진 실체라고 여겨지는 이 사건에 대해 진중권은 아직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 2. 윤석열 후보 열차 구둣발 사건 관련, 친누나를 비하·조롱 - 2022년 2월 14일
2022년 2월 14일 20대 대선을 앞두고 소위 '윤석열 후보 열차 구둣발 사건'이 발생합니다.
대선 유세기간이었던만큼 여기에 대해 정치적으로도 맹공이 있었고, 정치와 깊이 관여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윤 후보의 상식 없는 행동에 대해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일반인들로부터도 이런 저런 말이 수없이 나왔습니다. 진중권의 누나인 진회숙 씨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사건에 대해 짧게 글을 올렸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으로서의 반응 중 하나였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대한 진중권의 반응이었습니다.
'혼자 급발진한다'고도 표현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세상이 무너진듯한 긴급함을 가지고 작성한 듯한 저 진중권의 글에 대하여는 당사자인 진회숙 씨가 직접 신랄하게 반박했습니다. 진중권의 궤변과는 달리 대단히 논리적이고 상식적입니다. 원문을 아래에 옮겨두었으니 혹시 시간이 되시면 펼쳐서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습니다. 사실 나는 정치평론가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닌 일개 시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일개 시민이라도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표명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종의 사적 공간인 페북을 통해서는.
그래서 어제 윤석열의 구둣발 사진에 대한 나의 생각을 포스팅했습니다. 처음에는 (일종의 반어법이기는 했지만) 이건 합성 사진일 것이라는 글을 올렸고, 그 다음에는 합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참 충격적이다. 선진국에서는 이 사진 한 장이면 끝나는 것 아닌가?”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양 진영 사람들이 이게 진중권 누나의 글이라며 제 글을 공유하거나 캡처해서 퍼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서 찾은 제 사진과 동생 사진을 대비해 놓은 이미지까지 만들어 올린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신문에 진중권 누나 진회숙이 이런 말을 했다는 기사가 실리기까지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했습니다. 저는 그냥 제 개인의 생각을 사적 공간에 쓴 것 뿐인데, 그게 일파만파로 퍼져 저와 제 동생이 조리돌림 당하고 있는 상황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얼른 포스팅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캡처된 글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상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제 글을 캡처해서 퍼나르는 사람들이나 취재는 안 하고 남의 페북글을 짜깁기 해서 기사를 쓰는 기자들에게 화가 났지만 더 이상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일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참았습니다. 그저 유명한 동생을 둔 죄라고 생각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오늘 강양구 기자의 계정에 정말 믿지 못할 글이 올라왔습니다. 바로 이런 글입니다.
[진중권이 대신 사과드립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천년의상상 펴냄)를 함께 쓴 진중권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대신 올려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남매 간이신 진회숙 선생님께서 올리신 글이 화제가 되면서 그에 대해서 반응을 하신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현재 진중권 선생님의 페이스북 계정은 잦은 신고로 정지 상태입니다.)
*
“음악평론가 진회숙 씨는 선진국에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장관이 법인카드로 머리를 했다가 잘린 일이 있고, 스웨덴의 총리 지명자는 법인카드로 초컬릿을 샀다가 잘린 일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가벼운 실수를 가지고 그 의미를 한껏 부풀려 정치적 공격의 소재를 삼아 난리를 치는 것은 선전선동을 유일한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삼는 북한과 같은 후진국 사회에서나 보는 현상입니다.
한 번도 선진국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가족 일원의 몰상식한 발언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에 대해 진 씨 가문을 대표해 사과드립니다.
유권자 여러분은 선진국에 살아본 적 없는 분의 선진국 발언에 현혹되지 마시고, 이미 선진국인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오직 이성과 논리, 윤리 의식에 따라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고 저는 너무나 큰 충격과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이건 평소에 상식과 합리, 논리, 정의, 이성, 윤리, 자유,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진중권 씨답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입장을 밝히는 글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진중권 씨의 표현대로 그의 행동을 “선진국인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오직 이성과 논리, 윤리 의식에 따라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진중권 씨 말대로 저는 선진국에 살아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니 비록 짧게 나마 선진국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진중권 씨보다는 선진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겠지요. 이건 제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선진국에서는 기차 의자에 구둣발을 올려놓아도 용납되는 걸 몰랐다는 건 제 불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글에서 선진국에서 법인 카드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진중권 씨는 “독일에서는 장관이 법인카드로 머리를 했다가 잘린 일이 있고, 스웨덴의 총리 지명자는 법인카드로 초컬릿을 샀다가 잘린 일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문해력이 없는 건가요? 윤석열의 구둣발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이재명 부인 법카 사용에 대한 옹호로 읽히나요? Read between the lines를 하셨나? 내가 평소에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면 나름대로 이해가 가지만 저는 거의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더라고 그를 신처럼 숭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 다음에 ‘몰상식한 발언’이라는 표현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상식과 몰상식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본인하고 생각이 다르면 몰상식이고, 생각이 같으면 상식인가요? 사실 윤석열의 구둣발 사진에 대한 저의 반응은 다분히 정서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서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정말 혐오합니다. 그래서 그가 그 동안 했던 어떤 행동이나 발언보다 이게 더 충격적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 윤석열이 그 동안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데 겨우 이게 충격적이냐며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른 법입니다. 진중권 씨처럼 그런 사진으로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의 감정을 ‘몰상식’이라는 말로 치부하다니요.
선진국에서는 저 사진 하나로 끝나는 거 아닌가? 하는 말이 몰상식하다는 뜻일 수도 있겠군요. 말하자면 선진국에서는 저 정도는 문제 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진중권 씨가 선진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물어 보았는지, 설문조사라도 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이 사진에 대해 한 영국 교수는 저런 행동은 그 자체로 공직자로서 결격사유라고 했는데, 그는 선진국 국민이 아닌가 보지요? 자기가 몇 년 선진국에 살아보았다고 선진국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구요? 정치인도 아니고 정치 평론가도 아니고, 한 개인이 자기 페북에 자기 생각을 쓴 것이 어떻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건가요? 이건 그 동안 온갖 공적인 공간을 종횡무진으로 휘젓고 다니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온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진중권 씨가 말하는 ‘사회적 물의’가 바로 본인 때문에 야기되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았나요? 내가 진중권의 누나라는 바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여기저기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요?
그 동안 제 페북에 들어오셨던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제가 진중권의 누나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피해를 보고 있는지.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음악 관련 포스팅에다가 모욕적인 댓글을 달고, 그것에 대해 항의하면 “니가 진중권 누나인 죄다”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꼴통들에게 정서적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았는지. 심지어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영상에다 진중권 운운하며 쌍욕을 하는 인간들도 상대해야 했던 것이 누구 때문인데, 개인적으로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한 개인을 홍위병들의 인신 공격 대상으로 만든 것이 누구인데, 지금 누가 누구한테 ‘사회적 물의’를 운운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들에게 ‘진회숙이 대신 사과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못한 것은 그 사람들이지 진중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중권과 정치적 견해가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때는 완전히 다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생을 대신해 제가 사과 드립니다”라는 주제 넘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동생과 저는 완전히 다른 개체이니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으나까요.
자기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 가족에게 정서적 테러를 가하는 것은 정말 치사한 짓입니다. 저는 진중권이 왜 비난의 화살을 저에게 돌렸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비판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그것을 퍼나르며 자기 진영 유리한 대로 이용하는 사람들과 언론들입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자유로운 한 인간이고, 제 페북에 저의 생각을 쓸 자유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사적인 공간에 쓴 글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몰상식한 글’로 판단하고 ‘감히’ 사과씩이나 하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그 동안 그렇게 이성, 합리, 논리, 윤리를 중요성을 주장하던 사람이 할 행동인가요?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제가 가장 어이없어 하는 것은 진중권이 나의 몰상식한 행동에 대해 가족을 대표해서 사과를 드린다고 한 부분입니다. 이 글만 보면 우리 가족이 엄청나게 끈끈한 공동체 의식으로 뭉쳐 있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 저희는 20년 동안 서로 왕래를 안 하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요양 병원에서 가끔 스치듯 지나가는 남보다 못한 관계입니다. 서로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가족의 소식도 신문 기사를 통해서 아는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는데 여하튼 우리 가족은 그렇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고, 저도 그렇고 진중권도 그렇고 그렇게 사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점에서 갑자기 누나에게 없던 관심이 생긴 걸까요? 평소에 가족주의나 가부장제적 가치관을 도외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나를 끌어들여서 ‘진 씨 가문을 대표해서 사과를 드린다니’ 우리 가족 누구도 그에게 대표 자격을 부여한 적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비판한 저를 조롱하고 싶었겠지요. 그렇게 진중권의 누나는 평소에는 무관심 속에 있다가 그가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때만 소환되는 누나입니다.
저는 그 방식의 치사함과 비열함에 혀를 내두릅니다. 얼마나 저를 욕보이고 싶었으면 남의 계정까지 빌려서(자기 계정은 정지당함) 저런 글을 올릴까요? 그리고 그렇다고 그 글을 버젓이 올려주는 사람은 또 뭔가요? 그것이 얼마나 치사한 행동인지 정말 모르는 걸까요? 그 분들이 쓴 책의 제목을 패러디해서 표현하자면 이분들은 정말 제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둘’입니다.
어떻게 동생이 누나에게 그럴 수 있냐 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의 끈끈함이란 애초부터 없었으니까요. 다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공정하고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할 수 일인지. 단지 자기와 다른 정치적 의견을 페북에 올렸다는 이유로 타인을 이렇게 치사한 방법을 동원해서 모욕해도 되는지. 가장 앞장 서서 홍위병 깃발을 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P. S.
강양구 기자가 올린 글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서 엄청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는 이름이 꽤 많이 눈에 띠더군요. 그걸 보고 그냥 인간이 싫어졌습니다.
이렇듯 진중권은 조롱할 상황과 안 할 상황, 할 대상과 안 할 대상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직 조롱 그 자체를 너무나 하고 싶은 나머지, 정상적인 상황 판단을 전혀 못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 진중권, 그에게 '지성'이 있긴 한 걸까?
김규항은 '지성(知性)'을 가리켜 '압도적인 지식의 축적과 남다른 통찰력의 결합'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한때 저는 진중권이 지성을 가진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말고도 그렇게 믿은 분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제 믿음을 완전히 무너뜨린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변희재'와의 공개 토론이었습니다.
진중권은 변희재를 '변듣보', 즉 '듣도 보도 못한 이름 없는 잡스러운 존재'로 격하했었는데요. 변희재는 공개적으로 토론 배틀을 해서 논리와 팩트에서 우열을 가려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진중권은 당연히 자신이 이길 것을 자신하면서 "장르상 액션물이 아니라 코믹물이에요. 진중권의 뿅망치." 라고 토론의 승부를 단언했습니다. 뿅망치로 두더지를 때리듯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여 승리할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팩트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언어적 기교 즉, 조롱섞인 말장난으로 준비된 상대방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가 '듣보잡'이라고 평가절하했던 변희재에게 대패하고 맙니다.
사실 그동안 그는 깊은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주목받았다기 보다는 상대를 난도질하는 독설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통찰로 여겨졌던 독설의 겉껍질이 벗겨졌을 때 그 안에 있던 지식마저 압도적이지 못하다면 그를 더 이상 '지성인'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강준만 씨도 진중권에 대하여 '소아병적 정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는 여러 편에 걸친 장문으로 진중권의 언어를 분석한 바 있습니다. 강준만의 분석을 집약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중권은 자신을 독설가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중권은 독설가라기보다는 궤변가다.
사실에 대한 거짓말과 과장과 왜곡은 독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건 일종의 사기 행위다.
진중권 자신이 만든 표현을 진중권에게 되돌려 주자면,
진중권의 글쓰기는 <강간범의 글쓰기>다.
이는 과거 변희재도 지적했던 것이지만,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강간범의 글쓰기>라는 게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출처 : http://www.jabo.co.kr/702 )
진중권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언어로 상대방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깁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언어를 쓰면 상대방이 어떻게 하면 더 고통스러워 할지를 본능적으로 잘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메시지에 맞는 표현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다니며 작위적으로 메시지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메시지와 메시지 사이에 괴리와 충돌이 발생하게 되고,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억지로 극복하기 위해 궤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당신이 열광하는 그 궤변이 언젠가는 당신을 공격할 것이다.
그러므로 간혹 진중권의 어떤 발언과 글이 혹여 우리가 적대시하는 것을 동일하게 공격한다고 해서 우리가 "진중권이 우리 편이었어!" 하며 기뻐할 필요가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 '고장난 시계라도 하루 두 번은 시간을 정확하게 맞춥'니다. 그 두 번의 일치를 보고서 "역시 정확한 시계야!" 라고 열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와 동질감을 느끼거나 그가 우리편이라고 여기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3절)
예수가 남긴 이 말은 진중권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비판한 그 무언가가 혹시 나에게도 동일하게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고 고민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성찰'이라고 부릅니다.
진중권에게는 이 '성찰'이 없습니다. 그의 비판은 그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그 자신은 그가 말한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정치사회적인 이슈마다 권위 있는 지성인의 논평으로 무게감을 갖기를 바라면서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실상은 그저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조롱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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