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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글/일반

매트릭스

by 당위정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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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4일에 작성한 글입니다.)



지독한 원리주의자이자 보수신앙의 충실한 문하생이었던 1997년의 '나'에게 K전도사의 날라리 같은 영성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무척이나 이름있던 영화 '매트릭스'는 뉴에이지의 모양을 한 일체의 것들과 함께 일고의 여지도 없이 배척 대상이었다.

 

직접 본 사람은 없지만 '꼭 봐야 아냐'며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상영 반대 목소리처럼 - 또한 답답할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수구에 합하는 반동의식에 충일한 거개의 우리 부모님들처럼 - 나는 매트릭스에 대한 아무 호평에라도 귀를 닫았고 그 영화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만족에 행복해했다.

내가 골치 아파하는 범상치 않은 후배 C의 멘토였던 K전도사는 깔깔거리며 그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우리가 어디 가서 6천원으로 그런 영상을 볼 수 있겠냔 말야."

나뿐만 아니라, 하는 짓과는 다르게 제법 칼빈신학의 모양을 따라갈 줄도 알았던 후배 녀석은 믿었던(?) 멘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연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후 주안장로교회 청년부 주보 편집장을 맡으며 어느 정도 불순한 신앙적 지경을 체험한 나는 드디어 영화 '매트릭스'를 볼만한 정신적 관용을 갖게 되었다.

 

매트릭스를 반대하는 이들(과거의 나를 포함해서)의 입장은 간단하다. 매트릭스는 뉴에이지다. 매트릭스는 뉴에이지라서 절대 안된다. 이 단순한 논거는 너무나 명쾌해서 상대방이 말을 잃게 만든다. '뉴에이지'를 전가의 보도처럼 아무 때나 휘둘러대는 이들에게 진정 15세기 이탈리아 사제 사보나롤라가 그랬듯, '문화'의 이름이 붙은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려야 속시원할 것인지 묻고 싶다. '일주일에 세 번 빵과 물만 먹으며 금식하고 이틀은 포도주와 빵만 먹'었던 순수 신앙주의자들과 같이 우리는 영화관에서 '낮은데로 임하소서'와 '미션 바라바'만을 보아야 한단 말인가?

뒤늦게 비디오로 보게 된 매트릭스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감동과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달리 말해 이 영화는 상당히 '기독교적'이었다. 이점에 대해 무척 할 말이 많았는데, 자료 검색중 딴지일보에 이미 상당히 자세하게 분석해 놓은 글이 있었다. 

 

www.ddanzi.com/ddanziilbo/20/20_s1.html(현재는 열리지 않음)

 

딴지일보_21세기 명랑사회를 향하여

[속보] 文대통령 "백신 정치화해서 불안감 부추기지 말라" 경고 [서울경제] 문재인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수급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화하지 말라고 야당과 유력

www.ddanzi.com

관련된 부분만 옮기면,

 

네오는 이중의 삶을 산다. 매트릭스 시스템 내의 프로그래머 '토머스 앤더슨'과 매트릭스를 완전히 초월한 '네오'로, 마치 완전한 인성을 지닌 인간의 삶과, 인간을 초월한 신성을 동시에 누렸던 예수처럼.

또한, 그에게는 일곱의 '사도'가 있고, 예수의 열 둘 대신, 그 사도들 중에는 형제가 있으며( 예수의 12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였으며 매트릭스에서는 Tank와 Dozer가 형제다. 겨우 일곱 중 둘이 굳이 형제일 필요는 없다 - 모피스가 깨어난 네오에게 사람들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 Tank and his big brother, Dozer." 라고 소개한다)

그들 중 하나인 '싸이퍼'(Cypher)가 겨우 은 30냥에 예수를 판 '유다'처럼 겨우 스테이크를 먹으며 배신을 하고 ( 내부의 배신이 있어야만 붕괴될 만큼 네오 쪽이 막강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들이 맞섰던 매트릭스는 이미 충분히 강력했으므로 네오쪽 내부의 배신이 반드시 필요한 설정은 아니었다. ),

세례요한은 예수 이전에, 인간을 구원할 예수의 등장을 광야에서 기다리며 예수의 길을 예비한다. 예수는 세례요한에게서 '물'로 셰례를 받고 나서야 하여 비로소 예수로서의 '공적' 활동을 시작한다. (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 마가복음 1:3-4) 모피스는 평생을 매트릭스(광야)에서 '그'(the One - 구세주, 네오)의 등장을 기다리며, 인간을 구원할 '그'가 갈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 I've spent my entire life looking for you. )

(네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설정과 관련하여) 네오가 힘이 빠졌다가 간신히 회복되는 것으론 안된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죽지않고 힘이 빠졌다 회복되는 것은 '부활'이 아니다. '부활'을 상징하자니 먼저 죽일 수밖에.

이런 것들 이외에도 기독교와 신화를 상징적으로 활용한 것은 더 있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인간의 도시이자, 매트릭스와의 전쟁이 끝나면 축제가 벌어질 곳이 '시온'(Zion)이라고 불리고( " The last human city. If the war was over tomorrow, Zion is where the party would be". - 탱크가 네오에게 시온을 설명할 때 대사), SF 영화에 '선지자'가 등장하고, 천사에 해당될 숟가락을 구부리는 어린아이들의 등장하며, '예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설정 등... 그 외 본기자의 둔한 눈에 걸리지 않은 장치들이 틀림없이 더 있으리라 본다.

 

 

하이텔에도 못지 않은 글이 있었다. 

 

films.hitel.net/film.php?film=B4452 (현재는 열리지 않음)

 

 

여주인공 이름은 기독교 삼위일체를 뜻하는 트리니티(Trinity)라는 데서는 주요 인물 셋이 힘을 합쳐 승리하리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을 잡으려는 세 비밀요원은 스미스, 브라운, 존스이다. 미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을 붙인 건 인간 대부분이 가상현실에 매몰돼 있음을 드러내면서, 그 가상현실 체제의 편재성을 은유한다. 배신자 사이퍼(Cypher)는 숫자를 의미하는데, 그는 중반까지 가상체제에 맞서는 전사로 활약하지만, 결국 숫자 효율을 숭상하는 그 디지털 세계로 돌아갈 것임을 점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내재된 시나리오적 의미에 더하여 영화를 보고난 후 시종 날 붙든 건 또다른 이유였다. 매트릭스는 워쇼스키 형제의 작가적 상상에 불과하지만, 결국 우리는 매트릭스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주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는 이땅이 존재의 궁극적 의의라도 되는 것인양 살았었다. 죄가 공급하는 즐거움과 환상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그저 잠들어 있는 자였다. 그러던 우리가 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진짜' 삶을 얻게 된다. 물론 삶의 현실은 만만치 않다. 마냥 단꿈만 자다 직면하게 된 세상에는 얼마나 맞서 싸워야 할 대적들이 많은지!

이런 묵상들 가운데 나에겐 은혜의 메시지가 있었고, 결코 영화 '매트릭스'는 사탄의 궤계가 아니었다.

같은 선상에서 1997년에 개봉된 영화 '콘택트'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할까 한다. 천문학자이기도 한 칼 세이건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소녀 엘리(조디 포스터)는 밤마다 모르는 상대와의 교신을 기다리며 단파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천체물리학자가 된 엘리는 사막의 관측소에서 우주로부터 오는 단파 신호를 수신하던 어느 날 직녀성으로부터 정체 모를 메시지를 받게 된다. 수신은 계속되고 급기야 그 메시지의 의미를 해독하여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리고 해독된 메시지의 내용은 은하계를 왕복할 수 있는 이동 수단(기계 장치)의 설계도임이 밝혀진다.

전세계는 그 설계도로 인해 희망과 혼돈이 교차하기도 하지만, 설계도대로 성간 이동 장치가 완성된다. 마침내 엘리는 그 장치를 타고 여러 개의 윔홀을 통과하여 아름답기 그지없는 직녀성에 도착하고, 아버지의 형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발사된 지 단 몇 초 만에 바다에 떨어진 장치 속에서 그녀가 경험한 18시간의 외계 여행은 단지 그녀만의 것이 되고 만다.

 


이 영화 역시 기독교계의 저명한 월간지에 의해 '뉴에이지'라 낙인찍혔었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를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면 어쩌겠는가. '콘택트'는 '증명되지 않는 존재를 믿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다. 매튜 매커너히가 분한 파머 조스가 엘리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증명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외계인으로 표상된 미지의 존재에 대한 엘리의 동경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신에 대한 갈구와 병치되며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결국 외계여행을 통해 그녀가 동경하던 존재와의 조우를 이루고야 말지만, 그 경험은 그 누구에게도 증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으로 남는다. 그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인격적인 통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것을 객관화된 근거로 제시하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설명해주는 적절한 이야기였다.


언제까지고 무른 음식만 먹을 수는 없는 일이련만, 이렇듯 매트릭스나 콘택트 같은 영화를 '뉴에이지'로 치부하며 일고의 검토와 해석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편협함은 우리 크리스찬들을 무균실에서 서서히 죽이는 짓과 다름 아니다. 기성 기독문화 전문가들이 그들의 검열 잣대를 가동시키는 주요한 기준으로 '제작자의 세계관'을 말하지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영화 '불의전차' 배경음악을 담당한 반젤리스의 뉴에이지 전향 사실에 대하여는 여전히 정돈되지 못한 견해를 갖고 있는 점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 제작자의 불경건에도 불구하고 주의 뜻에 합하여 '선하게 사용되었다'는 쪽에 어느 정도 의견이 수렴하고 있으며, 같은 관점에서 영화 자체의 외형으로 고지식하게 '기독교성/반기독교성'을 단정하는 건 지혜롭지 못하다. 나아가서는 똑똑하고 신앙있는 그네들 몇몇의 잘난 머리로 옳고 그름을 낱낱이 판별할 수 있다는 우월의식마저 느껴진다.

바울이 말한바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것을 부정하다 부정하다 규정하고 스스로 올무에 얽어매는 그때에 비로소 죄중에 들게 된다. 잘 써서 약이 될 수 있는데 구태여 독으로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 나누는데 골몰하지 말고 영화 제대로 보는 법을 배우기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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