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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글/일반

경미

by 당위정 202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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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2주가 넘는 기간을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보내다시피 했던 일병 정기휴가 때완 달리 상병 정기휴가를 나와선 사람들을 만나는데 주력했던 것 같다. 소심한 성격탓에 너무나 친한 친구조차도 부담스러워 할까봐 불러내기를 주저했던 내가 12년동안 연락이 끊겼던 국민학교 동창에게까지 전화를 걸 수 있었던 건 지금 생각을 해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경미는 부산 강서구에서 태어난 내가 인천으로 올라오기 전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을 보냈던 영도에서 알게 된 아주 멋진 녀석이었다. 그 녀석과 친하게 된 계기는 분명치 않다. (늘 그렇듯 내 기억력은 각론으로 들어가면 쓰레기로 돌변한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바론 그 녀석은 사내 녀석들 못지 않게 만만치 않은 말괄량이였고 주근깨도 제법인 - 그래서 별명도 '깽미'였던 - 녀석이었다. 나는 그 녀석과 늘 단짝이었다. 반 아이들은 우리를 공식 커플처럼 취급해주었고 둘 다 불쾌감 없이 그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내가 그 녀석을 각별히 생각하는 건 수학여행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사내녀석들이나 계집아이들이나 이성과 함께 있기보단 저네들끼리 있기를 더 마음 편해 했던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3박 4일간의 수학여행동안에도 함께 하길 원했다. 둘째날이었던가, 부여에 들러 이름모를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온통 옷을 적신 채 버스에 올라섰고, 차안은 아이들의 몸에서 옷에서 모락모락 거리는 김이 가득했다. 그 녀석과 나는 한참이나 축축한 제 옷 걱정에 분주하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이 웃었다. 그 희뿌연 공기 속에서 우린 빗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머리칼을 맞대고 곤히 잠이 들었다.
  
그게 내가 그녀석에 대해 추억하는 기억의 전부다. 우린 졸업 후 이내 연락이 없었다. 난 분주했고 가난을 배우느라 바빴으며 그리곤 기억의 공백으로 다가온 그 녀석의 존재는 너무나 멀어보였다. 이따금 내가 가진 단 한 장의 유일한 그 녀석 사진을 들춰보며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우리 둘의 기억을 더듬어보는 게 전부였다.
  
상병 정기휴가를 앞두고 우연히 그 녀석의 핸드폰 번호를 알게 된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많은 생각없이 전화를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고민했더라면 결국 전화를 걸지 못했을 것이다.) 그 녀석의 목소리는 귀에 익은 음성이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부산행 열차표를 끊었다. 그 녀석은 부산역으로 마중을 나온다 했다. 나는 정말 그 녀석을 알아볼 수 있을까? 머릿속은 온통 엉망이었다. 부산역 광장에서 전화번호를 누르자 내 옆에 섰던 낯 모르는 처녀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옛날 주근깨 투성이의 말괄량이 소녀가 아니었다. 터틀넥 블라우스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경미는 캐주얼 차림의 나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린 서로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없는 나의 웃음과 그녀의 끄덕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옛적 즐거웠던 기억의 공통분모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허공에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으며,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 전엔 널 참 많이 생각했었다는 말에는 이제 철없던 시절의 풋내나는 허물을 거의 벗어던진 그녀의 세련됨에 대한 증거가 담겨있었다.
  
"저기가 우리집이야."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녀가 사는 곳은 크게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이름들 역시 한 동네에 살고 있다고 그녀는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12년을 살며 일상의 사소함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었던 그네들의 행복감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간단히 분리되었는지를. 나는 다만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쓰라린 박탈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차라리 경미를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깨달음의 깊이만큼 무거운 슬픔이 가슴을 짓눌렀다. 열차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와의 한 시간 남짓한 대화가 가져다준 친근함과 편안함이 그녀를 담아온 12년간의 기억의 결과를 압도한 건 내겐 참으로 기이한 경험으로 남았다.

그날밤 경미와 함께 걸었던 거리의 적막함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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